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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
글・사진=양승덕
에디터=이다일
기차와 연탄, 돼지갈비, 붕어빵, 포장마차, 가난하면 떠오르는 곳 굴다리. 그곳은 서민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다. 안도현은 시 '이리역 굴다리'에서 "징징거리며 앞지르는 오토바이, 막노동꾼과 공무원도 단발머리 여학생 몇몇과 노인도 모두 섞이어 간다. 이렇게 수십년 지나갔으므로 역사는 기록될 수 있었다."고 썼다. 흔한 우리들이 다니던 길. 팍팍한 세월을 힘써 이겨내던 아저씨, 아주머니의 얼굴이 흘러가던 길. 뿌연 불빛 아래서 거나하게 마신 얼굴로 하늘 높이 담배연기 내뿜던 운동권 대학생도, 어깨 처진 퇴근길 부장님도 모두 그 길 위에 있었다. 가난했지만, 그 무거운 철로와 기차를 이고 살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희망을 피웠던 우리들의 역사, 굴다리.
굴다리를 떠올리면 아프기도 하고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 옆에 오래도록 함께 한 불멸의 장소가 굴다리다. 또한 굴다리는 전국적이다. 포장도로가 생기기 전부터, 아니 광화문 한가운데로 전철이 먼저 다녔고, 백두대간 구비구비 철길이 나면서 굴다리라는 지명이 없는 곳이 없었다. 기차역이 있었던 동네는 어디나 무슨 굴다리라는 지명이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기찻길 밑으로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포장마차도 만들고, 붕어빵도 팔고, 돼지갈비도 굽고, 곱창도 볶고, 막걸리도 부딪히면서 행복해했다. 그 불행의 이미지는 서민들에 의해 닦고 다듬어지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삶의 장소로 거듭났다.
그런 역사의 한복판에 국밥집이 없을 리 없다. 굴다리 근처 국밥집만 다녀도 평생이 벅찰 것이다. '함창굴다리식당'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명세를 타는 국밥집은 아니다. 함창이라는 동네가 벌써 낯설다. 상주, 문경이 함창을 품고 있는 조금 유명한 군소 도시다. 상주에 속해 있지만 문경에 가깝다. 1924년에 개통된 경북선이 김천의 경부선과 영주의 중앙선을 이어주었는데 함창은 그 중간 즈음에 있었다. 대략 경북 산간 지역의 기차가 다니던 곳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그 굴다리식당은 30년이 넘었는데 소내장국만을 취급한다. 굴다리 옆 소내장국은 고급 음식이다. 굴다리 옆이라고 서민 음식만 흥행하는 것은 아니다. 소를 많이 키웠고,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속 고기를 활용할 수 있었던 지역의 특색이 반영된 음식인데 만원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소고기를 먹고 싶은데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은 외식을 할 때면 소내장국을 먹었을 것이다.
마침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고, 가마솥이 걸려 있는 마당을 지나 식당에 들어서면 읍내 식당치고는 깔끔하다. 늦은 오후에 들어선 식당은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아무도 없었는데, 젊은 여자주인이 어머니 같은 아주머니와 소 내장을 손질하고 있었다. 홍창과 양을 작은 불순물 하나 남기지 않고 칼로 긁어 내고 또 긁어 내고 있었다. 소내장국에 주로 쓰이는 재료라고 한다. 홍창은 붉은 색을 띄는 소의 마지막 위, 즉 막창을 말하며 양은 소의 첫번째 위를 말한다. 양평해장국은 양을 표면의 털 같은 모양을 그대로 쓰는 반면 소내장국은 그 표면을 긁어 내고 가죽 고기만을 사용한다. 아산 외암마을에 가면 맛볼 수 있는 수구레국밥의 고기와 비슷하게 재료를 준비한다.
두 여자의 야무진 손길을 보며 소내장국을 먹는데, ‘오길 잘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소내장의 재료들이 부드럽게 씹히며 고기맛을 내고, 토란과 대파가 채소의 대표격으로 가득 들어있다. 다진 마늘과 고추를 별도로 내어 주는데 꼭 국물에 넣어 맛을 돋우는 것이 좋고, 모든 국밥이 그렇지만 소내장국은 처음부터 밥을 말아야 제격이다. 속이 허하다고 느낄 때 소내장국 만한 게 없다.
국밥을 먹을 때면 소주 한 병을 버릇처럼 시킨다. 그런데 국밥의 맛에 따라 먹는 소주의 양이 달라지는데 함창소머리국밥은 소주 반 병을 금새 비우게 만든다. 국밥이 맛있으면 소주가 계속 당긴다. 소주를 같이 먹을 때 맛있는 국밥이야말로 국밥기행에서 터득한 맛있는 국밥의 기준이기도 하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국밥집을 나올 때면 국밥 옆에는 몇 잔 비운 소주 병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낭만적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운 좋게 만나는 맛있는 식당이 있다. 그것도 움직여야 하는 시간에 맞게 헛걸음 없이 밥을 먹을 때 기분이 더 좋다. 함창굴다리식당은 그렇게 우연히 만난 늦은 오후의 맛있는 국밥이었다. 또 기차가 지나갈까 어린 시절 마냥 식당 마당 앞에 서성이다 기차는 못 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만 맞았다. 봄비였다.
양승덕 작가 / 홍보회사 웰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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